









* 음악을 재생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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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쳐흐를 듯이 끓어오르는 진득한 분노는 늘 예고 없이 찾아온다.
맑은 아침의 푸른 바닷물처럼 잔잔하다가도 한순간에 폭우 뒤 강물처럼 탁해지고, 곧 아득한 늪이 되어 나를 집어삼키는 그 감정은 무슨 수를 써서 빠져나오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다.
늘 상상한다. 만악의 근원인 …의 목을 조르는 상상을. 그의 몸에 폭탄을 설치해서 무표정하게 기폭장치의 버튼을 누르고는 나를 불태우는 그런 상상을 한다. 그가 고통스럽게 내지르는 외마디 비명과 뒤늦은 후회가 담긴 헛웃음을 상상한다. 그의 잘난 얼굴을 짓누르고 내가 허우적거리는 이 우울함의 늪 속으로 몸을 처박아버리는 상상을 한다.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그 몸에 칼을 찔러넣는 상상을 한다. 불타오른다. 내가 불타오르는지, 그가 불타오르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미쳐가고 있다.
* * *
겨우 잠재웠던 감정이 다시 휘몰아치자 나는 그 진도가 더 심해지기 전에 미용실의 문을 닫았다.
손님은 오지 않는다. 아마 후미진 곳에 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마는, 다른 미용실들보다 확실히 손님의 발걸음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미용실 원장에 대한 소문이 그다지 좋지는 못하게 났는지, 단골을 만들기는 힘들었다. 내가 잘못한 건 없는데, 대체 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말은 늘 와전되고 와전된 소문은 해명보다 빨리, 그리고 멀리 퍼져나간다. 밤마다 울음소리가 들리는 미용실이라. 동네 꼬마가 아무렇게나 말하고 다니는 것을 들었다. 잠귀가 밝은 것인지, 내 울음소리가 그리 큰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외로워진다.
이런 시간이면 나는 서랍에서 빛바랜 사진을 늘 꺼내 든다. 내가 가장 빛났을 때 옆에서 나를 함께 빛내주었던 사람들. 그들의 행복한 미소를 보고 있자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운 얼굴들을 하나하나 쓰다듬어본다. 나의 모습부터, 서 형사, 권 경감님, 양반, 상일 경위님……. 보통 때라면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그사이에 끼어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박근태. 사람의 탈을 쓴 욕망의 무언가, 나를 이 늪에 처박아버린 장본인.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은 자신을 믿었던 다른 이들에게 넘겨버리고, 자신은 그 탄탄한 기반을 딛고 일어선 원수.
그 인간의 잘난 면상을 본 나의 잘못일까? 그 인간과 그와 관련된 모두를 알게 된 나의 잘못일까? 모든 것에 혐오감을 느끼고 그의 휘하를 박차고 나온 나의 잘못일까? 그의 손짓 한 번으로 목숨과 명예 모두를 잃은 이들을 회피하며 이 외진 미용실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손님들을 맞이하는 나의 잘못일까? 항우울제를 손에 잡히는 곳에 두지 않은 나의 잘못일까? 과연 이 모든 것은 나의 잘못일까?
이 수많은 질문을 없애는 방법은 모든 것을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하는 것밖에는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동안 겪어왔었던 모든 우울감 끝에 내린 해답이다. 하지만 오늘은, 탓하기 쉬운 나 자신 대신 눈앞에 떡하니 있는 상판대기에 내 모든 감정을 뱉어내고 싶었다. 충동적인 감정이었으나, 이미 충동적인 결정과 쉬운 행동들로 이루어진 내 인생에서 그 감정 한 번쯤 만족시켜주는 게 뭐가 어렵겠는가. 사진을 집어 던져보았지만 그걸로는 충분치 않아서, 옆에 있던 화분을 집어서 벽 쪽으로 던져버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진 유리병을 치우려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았다.
상일 경위님이 해주셨던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박근태는 사실 결혼하기 전 교제하고 있던 연인이 있었으며, 정치적 야욕에 눈멀어 그녀를 내치고 백석 그룹 회장의 딸과 결혼했다는. 그의 전애인은 7년 전 유방암으로 외로이 세상을 떠났고, 그 죄에도 불구하고 박근태는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무언가를 느꼈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그 누군가와의 연결을.
- 어떻게 사랑이 변해?
- 젊은 여자랑 결혼해봤자 별거 없네요.
매섭게 쏘아붙이던 옛날의 내 목소리가 귓전을 다시 울리는 듯했다. 누군가가 나에게 다시금 물어본다면 아마 똑같은 대답을 하리라. 하지만 내포되어있는 의미가 달라지겠지. 나는 내가 두려워했던 모든 것을 겪었다. 영원할 줄 알았던 사랑이 변하는 것과 모두에게 버림받는 것. 쓸모없어지는 것. 나의 존재 이유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를 위한 복수였다.
그를 향한 나의 복수 중 적어도 일부는 외로이 숨이 멎었을 그녀를 위함일 것이었다. 사랑은 변할 수 없다. 변하지 않아야만 한다. 큰 그림이라는 단어로 가려진 그의 배신이 그녀에게 무슨 여파를 남겼을까 생각하면 언제든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의 혼이 아직 구천을 떠돌아다니며 울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무언가가 찢어지는 듯 고통스러운 울음소리다. 내 것이라 생각했던 그것은 곧 처음 들어보는 여인의 것이 되고, 어렸을 적 나의 것이 되고, 지하에 갇혀있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된다. 그제야 나는 지하실에 갇혀있는 아이의 존재를 다시금 떠올렸다. 늘어지는 몸뚱이를 억지로 움직여 겨우겨우 지하실의 문을 열고 내려갔다.
아이의 입은 재갈이 물려 막혀있었다. 얼굴에는 눈물도 흐르지 않고 있었다. 울음소리는 누구의 것이었을까. 궁금증이 들었으나 곧 사라졌다. 나는 더 논리적으로 생각할 기력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와 아이는 서로 홀린 듯 철창 가까이 다가갔다. 나는 아이의 재갈을 풀어주었다.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다시 낯선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나는 귀를 막았으나, 아이는 멍한 눈으로 움츠리는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이와 눈을 맞춘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아이의 입이 열렸다.
내 아이를 죽이려 한다면, 당신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
아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내가 지금 무엇을 들은 것인지 확실치 않았으나, 아이는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내 아이, 라고 했던가. 그래, 이 아이도 홍은애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이였겠지. 마음속 어딘가가 아려왔다. 박근태의 아이인 박수정은 안전한 곳에 있다. 이 아이는 죄가 없겠지. 하지만 상일 경위님의 한을 풀어드리기 위한 제물이 될 것이다. 내가 원한 복수는 이런 것인가? 정말 이런 방법으로 진정한 복수를 이룰 수 있을까.
이 아이가 갇혀있는 이 철창 앞에는 곧 폭탄이 설치될 것이다. 나 역시 상일 경위님의 계획을 모두 아는 것은 아니었으나 필요한 희생이라고 생각했다. 십 년간 준비해온 계획일 것이다. 내가 아는 그분은, 계획이 완벽하지 않으면 실행하는 사람이 아닐 터였다. 그의 완벽함을 믿기로 했고 그를 위하여 나의 복수를 양보하기로 하였다.
머리가 울려서 짧은 비명을 지르며 철창에서 떨어졌다. 아이도 파드득 철창에서 떨어져 구석에 웅크리고 앉았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아이의 부름을 피해서 미용실로 다시 올라왔다. 숨이 벅차올랐다.
넘쳐흐를 듯이 끓어오르는 진득한 분노는 늘 예고 없이 찾아온다.
깊어질 대로 깊어진 감정의 골에서 범람하는 강물을 잠재워준 것은, 다시 걸려온 당신의 전화 한 통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