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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도 늦었는데, 자고 가."
익숙한 온기가 팔을 붙잡는다. 다정한 손이다. 은창은 잠시 그 손을 바라보고 섰다. 머뭇거리는 기색을 놓치지 않고 금세 한 번 더 설득의 말이 따라붙었다.
"자고 가, 이제 눈치 볼 사람도 없잖아?"
덜걱, 메마른 마음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안 돼. 은창은 지레 놀라 그것을 꾹 찍어눌렀다. 안 돼, 절대로. 팔을 잡은 손은 밀어내자 순순히 떨어졌다. 체온이 닿은 곳이 순식간에 허전해진다. 안 돼, 속으로 또다시 읊조리고는 꽉 붙은 입술을 간신히 떼었다.
"더 신세 질 수는 없잖아요. 가보겠습니다."
현석은 그를 더 붙잡지는 않았다. 다행이었다. 은창은 황급히 신발을 신고 현관을 빠져나왔다. 도망치는 듯한 걸음이었다. 아니, 명백히 그는 도망치고 있었다. 현석으로부터, 그의 집으로부터, 그의 온기로부터. 한 자락 붙어 따라온 잔상조차 더는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매서운 바람이 옷깃에 스며 살을 에었다. 은창은 몸을 움츠렸다. 그를 만나는 날에는 이 겨울이 유독 더 추웠다. 비단 이번 겨울만의 일이 아니라, 그를 만난 이후의 겨울은 언제나 그랬다. 그의 다정함을 한 줌이라도 들이마시고 나면 겨울의 냉기는 도무지 혼자 견딜 수가 없는 것이 되었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이곳에 잘못된 것이 있다면, 오직 저 하나인데.
그의 말이 맞았다. 은창은 더 이상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 선진화파의 소탕이 끝났기 때문이다. 잔챙이들이 몇 남긴 했지만, 머리가 잘렸으니 오래 버티지 못하고 금방 정리될 터였다. 제 주변에 있던 놈들은 알고 보니 죄다 잠입 경찰이었단다. 걱정했던 시간이 허망해 헛웃음이 나왔다. 하긴, 제가 누굴 걱정할 처지였던가. 아무튼 그 녀석들도 전부 복귀하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은창의 복수도, 정보원으로서의 쓰임도 완전히 끝이 났다. 끝이 난 줄 알았다.
그러나 현석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한가해진 은창을 전보다 더 많이 불러댔다. 그의 집에서 따뜻한 밥을 먹이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때로는 재워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은창의 어깨를 두드리며 약속했다.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게 끝까지 도와주겠다고, 밝은 세상 아래서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게 인도해주겠노라고.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은창은 그 위로와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주 잠깐은, 정말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은창이 이상함을 느낀 건 현석이 부르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그 집에 찾아가려 하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였다. 한 번 자각하니 그간 의식하지 못했던 행동들이 와르르 밀려들었다. 그의 전화를 기다리고, 먼저 전화기를 들까 수십 번 망설이고, 그를 그리워했던 것까지.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그저 새로운 삶을 얻는 것뿐만이 아닌, 그의 곁에 함께 서기를 바라고 있다는걸. 주제도 모르고, 대체 그 사람에게 어디까지 바라는 거야. 은창은 제 이기심에 소스라쳤다.
현석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당혹해할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제 마음에 답하지 못해 한없이 미안해할 그 다정한 눈빛도. 숨이 턱 막혔다. 안 돼, 절대로 들켜선 안 된다. 은창은 생각을 황급히 수습했다. 그가 자신을 불편해 하면 어쩌나, 다시는 보지 않으려 하면 어쩌나 덜컥 겁이 났다. 나만 조심하면 돼. 감정을 덮고 또 덮었다. 그러나 은창은 그의 부름에 매번 응하면서도 그 곁에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제 모든 것을 털어놓게 만드는 그에게 들킬까봐, 제 마음이 더 깊어질까봐. 후회와 자책이 밀려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작은 욕심이라도 가지면 안 되는 거였다. 한 번 생긴 욕심은 끝이 없어서, 꾸역꾸역 몸집을 불려 결국 가질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했다.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그 희망에 중독된 후였다. 이미 붙잡은 손이, 그에게 받아버린 것들이 너무 따뜻해서, 너무 좋아서, 놓을 수가 없었다. 놓기 싫었다. 멍청하게도.
차가운 공기가 날카롭게 폐를 긁었다. 마비되었던 정신이 그제야 현실로 돌아왔다. 그래, 이곳이 그의 세상이다. 정은창이 본래 있었던, 그리고 있어야 할 세상.
어쩌다 이렇게 갈구하게 되었나. 그의 애정을, 그 온기를.
이는 탐욕이다. 지나치다 못해 넘쳐흘러 목을 죄어올, 끝내 그를 중독시키고 모든 것을 망칠 독이다.
은창은 제 탐욕을 현석이 영영 모르길 바랐다.
***
현석은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제 손길을 끊어내는 모습은 조금 매정하리만치 단호했다. 아직 그만큼의 안정도 주지 못하고 있나, 한숨을 쉰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은창은 현석의 집에서 자고 가는 것을 피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계속 권하면 못 이기는 척 제안을 받아들여, 두셋에 한 번 정도는 제집에서 재울 수 있었는데.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빤히 보이는 벽을 쳤다. 현석의 부름에 꼬박꼬박 식사를 하러 오면서도, 결코 그 이상 머무르려 하진 않는다. 현석으로서는 그 행동의 기점이 어디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대체 무엇이 그와 자신 사이에 이만한 거리를 만들었나.
혹시 저도 모르게 마음을 내보인 것은 아닐까, 그간 있었던 일들을 수십 번 되짚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실수는 없었다. 현석은 언제나 적정선을 유지하려 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결코 은창이 부담스러워 하지 않도록. 그저 평소처럼.
그건 분명한 현석의 욕심이었다.
자꾸만 은창에게 향하는 제 시선을 알아차린 지는 좀 되었다. 다시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여전히 생소한 감정이었다. 처음에는 당황해 기억을 뒤져보기도 했다. 어쩌다, 대체 어느 순간에. 의미 없는 질문이고 행동이었다. 한순간에 생길 감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분명 자신과 은창의 선택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낸 것이리라. 그렇게 확신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은 선명했다. 고민은 짧았다. 현석은 은창을 이끌어주기로 약속했으니, 아직 시간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잘라내기엔 이른 마음이니 최대한 노력해봐야지. 그렇게 다짐했다.
거기까지야 좋았는데. 왜, 왜일까. 그는 무엇이 두려워 그리 쫓기듯 선을 그을까. 소파에 앉아 생각을 짚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은창과 이 소파에 앉아 긴 이야기를 나누다 자러 가곤 했었는데, 언제쯤 다시 그런 날이 오려나. 문득 쓴웃음이 났다. 이런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게 될 줄이야.
현석은 이미 은창을 선택했다. 그리고 은창 역시 자신을 선택해주길 바랐다. 은창의 새로운 삶에 자신이 있었으면 했다.
어떻게 하면 네가 이 이상 멀어지려 하지 않을까. 조급해지는 마음을 천천히 억눌렀다.
내가 널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 하지만 그럴지라도, 나는 기꺼이 그것을 쥐고 있을 것이다.
현석은 제 욕심을 부디 은창이 알아주길 바랐다.

